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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와 백련암산이 좋아예/가야산 2008. 12. 2. 00:26
가야산 상왕봉에서 해인사쪽으로 하산을 하다보면 하산이 끝나는 지점에 해인사가 있습니다. 오늘 산행에서는 해인사를 둘러보고 시간이 허락하면 성철스님이 입적하시기 전까지 머물렀다는 백련암을 둘러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부지런히 하산길을 재촉하였습니다. 法寶寺刹 해인사는 佛寶寺刹인 통도사와 僧寶寺刹인 송광사와 함께 한국의 삼대사찰에 속합니다.
산행에서 내려오면 이 길로 해인사 경내로 들어갑니다.
해인사 대적광전(대웅전)입니다.
대적광전에서 오른쪽으로 나오면 백련암 가는 산길이 있습니다.
여기서 백련암까지는 1Km 쯤되는데 걸어서 20여분 걸린다고 스님이 말씀해 주시네요...
이 길을 지나...
백련암은 오른쪽으로...
50m 쯤 가다가 왼쪽으로 가면 희랑대이고 백련암은 직진으로 500m 쯤 더 가야 하는데 제법 경사진 길입니다...
드디어 백련암 입구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땅의 불자님들은 다들 어디로 가셨는지 산사는 적막함에 싸여 있었습니다...
성철스님을 모신 고심원이고...
법당인 적광전입니다...
성철스님이 계셨던 정념당입니다.
여기서도 인류평화를 위해 기원을 드리고....
산사의 고요함을 깨는 유일한 소리는 스님의 장작 패는 소리 뿐이었습니다....
백련암은 가야산 해인사 암자 가운데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깊고 조용할 뿐 아니라 경계 또한 탁 트여 조망이 시원한 곳입니다.
특히 암자 주변에 우거진 노송과, 환적대, 절상대, 용각대,신선대와 같은 기암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어 예부터 백련암터를 가야산의 으뜸가는 절승지로 일컬어 왔다고 합니다.
백련암을 처음 창건한 연대는 잘 알 수 없고 다만 선조 38년 곧 서기 1605년에 서산대사의 문하였던 소암스님이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오래 전부터 고승들이 즐겨 수행처로 삼아 오던 이곳은 역대로 산중 어른들이 주석해 왔습니다.
곧, 소암대사를 비롯하여 환적, 풍계, 성봉, 인파대사와 같은 스님들이 일찍이 주석하였고, 몇 해 전 성철스님께서 입적하기 전까지 주석하셨습니다.
현재 이곳에는 대적광전과 성철 스님이 계셨던 정념당을 위시하여 성철스님 전신상을 모신 고심원, 영자당, 요사채 등 기존 건물에 여러 건물들을 새로 지어 웬만한 절집 못지 않은 암자가 되었습니다. 성철 스님 계셨다면 크게 꾸짖을 일이지요.
성철 스님의 수행 ++ 장좌불와(長坐不臥)
성철스님은 그 수행의 예봉과 다문박식으로 제방 선원에서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특히나 지금도 널리 이야기 되고 있는 그 유명한 '장좌불와長坐不臥' 수행은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눕지도, 자지도 않는 장좌불와 정진은 동화사 금당에서 견성한 뒤로 여덟 해 동안 줄곧 이어졌습니다. 스님은 그 여덟 해 동안에 밤중에도 잠은커녕 졸음으로 고개 한 번 떨구어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어느 때인가 도봉산 망월사에서 하룻 밤을 지낼 때입니다. 그날 밤도 여느 때처럼 장좌불와로 밤을 지새는데, 마침 망월사에 머물고 있던 춘성 노스님이 "저 철 수좌가 정말 소문대로 눕지도 않고 졸지도 않으면서 좌복 위에 꼿꼿이 앉아 지새는가?"하여 문에 구멍을 뚫고 날이 새도록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과연 소문대로 좌복 위에서 꼼짝도 않고 정진하는 모습을 보고는 크게 감탄하여, 그 때부터 춘성 노스님도 환갑이 다 된 나이에 장좌불와 수행을 열심히 하였다고 합니다.
또 금강산 마하연사에서 정진하던 이야기입니다. 마치 큰 바위같이 아무런 움직임도 흔들림도 없이 참선에 몰두하던 스님에게 하루는 어머니가 그 춥고 먼 곳을 찾아왔습니다. 스님이 "볼 필요 없다"하며 어머니를 만나 주지도 않고 그냥 돌려보내려 하자, 선방의 대중들이 들고 일어나 "아무리 우리가 세상과 인연을 끊은 수행승이지만 철 수좌는 인정이 너무 없다"면서 어머니를 맞이하지 않으려면 그 곳을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도반들에게 떠밀린 스님은 하는 수 없어 어머님을 등에 업고 이레 동안 금강산을 구경시켜 드렸습니다.
성철스님의 수행 ++ 삼천배
육이오전쟁 뒤에 성철스님은 월내의 묘관음사에 이어 통영 은봉 암에 얼마 동안 머뭅니다. 그러다가 안정사 앞 골짜기에 초가 세 채로 된 토굴을 짓고 천제굴이라고 이름하여 그곳에 주석합니다.
그때에 근처의 많은 신남신녀들이 스님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고, 스님의 법문을 듣고는 발심하여 출가하는 일이 잇달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철스님 믿다가는 집안 망한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스님의 법문은 유한한 인생에서 일시적인 행복을 버리고 영원한 행복을 찾아나서지 않을 수 없는 높고 깊은 설득력을 지녔던 것입니다.
스님은 이 곳에서 처음으로 신도들에게 그 유명한 삼천배를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을 만나려면 젊은이든 노인이든 재벌이든 장관이든 누구 할 것 없이 먼저 부처님 앞에서 삼천배를 해야 했습니다. 절은 그 행위 자체가 참회요 공덕인 것입니다.
삼천배는 그것을 삼천 번씩 되풀이하며 스스로를 낮추고 마음의 때를 닦아 없애 나가는 과정입니다. 스님이 신도들에게 예외없이 삼천배를 시킨 까닭은, 아마도 쉬임없이 무릎과 허리를 폈다 구부렸다 하며 삼천 번 절하는 동안에 느끼는 육체적인 고통 속에서 스스로 마음의 먼지를 닦아 없애서 자기를 바로 보게하려는 방편에서였을 터입니다. 스님은 또 삼천배 기도 말고도 신도들을 위한 수행 방법의 하나로서 아비라 기도라는 독특한 예불 의식을 만들어 전해 주었습니다. 이 아비라 기도는 삼천배의 예배 절차와 함께 그 뒤로도 줄곧 이어져 큰스님 살아 생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까지도 해인사 백련암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철스님은 이렇듯 신도들에게 기도를 통한 참회와 수행을 철저히 가르치는 한편, 당신 스스로도 평생을 두고 하루도 빠짐없이 일체 중생을 위한 백팔배 참회 기도를 함으로써 수행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성철스님의 수행 ++ 파계사철조망
정화운동이라 하여 비구승과 대처승 사이의 투쟁이 불거지던 무렵입니다. 한평생 수행자의 길에서 한치도 벗어남이 없던 스님은 정화 운동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절 재산을 모두 사회에 내주고 승려는 걸식하며 수행에 힘쓰자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절 뺏기 식의 정화가 되어 자칫 잘못하여 묵은 도둑 쫓아내고 새 도둑을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것을 우려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성철스님의 그 간곡한 뜻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스님은 1955년 겨울에 대구 팔공산에 있는 파계사 성전암으로 거처를 옮기고는 그뒤로 십년 동안 한번도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십 년에 걸친 동구불출(洞口不出), 팔 년 장좌불와에 이은 또 하나의 신화를 이룬 것입니다. 스님은 퇴락한 성전암을 수리하고는 그 둘레에 철조망을 둘렀습니다. 그렇게 둘러친 철조망 안에서 일체의 바깥 출입을 삼가면서 스님은 차곡차곡 한국 불교의 앞날을 준비하였습니다. 수많은 불경과 조사어록을 공부함은 물론, 과학과 수학 같은 학문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바깥에서는 불교정화라는 이름으로 대처승과 비구승의 투쟁이 한창일 때, 스님은 시류를 멀리한 채, 한국 불교의 진정한 내적 정화를 위해 든든한 징검다리를 놓고 있었으니, 곧 뒷날 '성철 불교'라 일컫게 된 독보적인 불교이론과 실천 논리를 확립합니다.
스님은 성전암에 있는 동안에 결제와 해제 앞 뒤로 일 년에 네 번은 문을 열어 신도들을 위하여 기도 법회를 열고는 하였습니다.
1965년 성철스님은 마침내 굳게 닫은 성전암 문을 열고 나옵니다. 그 길로 김용사에서 대중들을 모아 놓고 스님의 사상을 거침없이 토해 내기 시작하니 그것이 대중 앞에서 한 최초의 법문이었습니다. 십 년 동안 걸어잠근 문을 열자 자운스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운스님은 성철스님을 설득하여 해인사의 백련암으로 모셔 갔습니다.
성철스님과 백련암
봉암사에서 결사의지를 되살리며 자운스님은 청담스님과 함께 해인사를 총림으로 키우는 데에 뜻을 모았고, 성철스님은 그 뜻을 받아들여 1967년에 해인총림의 초대 방장으로 취임 하였습니다.
한걸음 한걸음 위기의 국면으로 빠져들고 있던 한국불교계가 그 때에 선택한 분이 바로 성철 큰스님이었습니다.
큰스님이야말로 허물어져 가는 불교를 받쳐줄 기둥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철 큰스님은“내 이름을 빌려주어서 불교가 중흥한다면 기꺼이 응하겠다”며 제7대 종정직을 수락하였습니다.
그 때까지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지 않던 성철 큰스님은, 이 때에 취임법어 하나로 대뜸 세간을 술렁이게 하면서 많은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원각이 보조하니 적과 멸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시회대중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山是山 水是水)
일찍이 그 박학다문함과 장좌불와 팔 년, 동구불출 십 년 같은 일로 세상을 놀라게 하였거니와, 또 그 독보적인 사상과 선풍으로써 이땅의 불교계에 새로운 지평을 연 성철큰스님은, 1967년 이후로 줄곧 가야산 해인사를 지켜오는 동안에‘가야산 호랑이’라는 별칭을 얻습니다. 공부하는 대중 스님들을 늘 잔뜩 긴장시키던, 그 불길 같고 서릿발 같은 가르침의 엄격함 덕분에 얻은 이름입니다.
정진 중에 어느 스님이 잠깐이라도 졸음에 빠질라치면 이내“이 도둑놈아, 밥값 내놔라!”하는 쩌렁쩌렁한 고함소리와 함께 등줄기에 장군죽비가 날아오곤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상하고 유머도 풍부하며 짐짓 장난스러운 면모도 드러내고는 하였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퍽 좋아하여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꼭 천진무구한 아이 같았고, 도반들과 함께 있을 때면 씨름을 하기도 하면서 짓궂은 장난을 예사로 하였습니다. 법문 사이에 끼어드는 우스갯소리도 여간 구수하지가 않았습니다.
또 큰스님은 "도를 이루려면 가난부터 배워라"고 가르치면서 스스로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음식은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을 정도면 된다며 소식으로 일관해왔는가 하면, 여름에는 삼베, 겨울에는 광목으로 옷 한 벌에 바리때 하나만으로 지내는 청빈한 삶을 이어 왔으니, 그나마 그 한벌 옷도 여든 나이가 되도록 손수 기워 입었습니다.
"스님, 입고 계신 옷이 저희가 보기에는 상당히 남루하고 누더기입니다만 몇 년 동안 입으셨습니까?"
"삼십 년 넘었어. 이 옷이 두 갠데 번갈아 가며 입어. 삼십 년 넘었어. 거의 사십년 됐어."
"평상시에 안 입고 예식 있을 때에만 입으십니까?"
"장 입고 다니는 옷이라."
"늘 입고 다니시는 옷이군요."
"오늘 특별히 입고 나온 줄 아는 모양이네. 나 장 입고 다니는 옷이야."
"......"
"나 제일 못났기 때문에 좋은 옷 입을 자격이 없어. 아무 자격이 없는데 좋은 옷 입을 수가 있나."
스님을 찾아온 어느 기자와의 대화 한 자락입니다.
( http://cafe.daum.net/banyaam3211에서 송지월님이 쓴 글을 옮겨왔습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원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04년에 가 본 겁외사입니다.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바로 옆에 성철스님 생가와 겁외사가 있다. 성철 스님은 현대 불교를 대표하는 선승으로, 해인사의 초대 방장을 지내셨고 조계종 제6대 종정이시기도 했다.
말년에 주로 무주 덕유산의 백련사에서 지내셨으며, 1993년 11월 82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셨다. 성철스님의 열반 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는 성철스님의 말이 사람들 사이에 많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이 곳 묵곡리는 1912년 음력 2월 19일 성철대종사가 태어난 곳으로 해인사 성철스님문도회와 산청군은 1998년 성철대종사 열반 5주기를 맞이하여 단순한 생가복원 차원을 넘어서 성철스님기념관을 세워 수행의 정신과 그 가르침을 기리고 겁외사를 건립하여 종교를 뛰어넘는 선 수행, 가르침, 포교의 공간을 조성하여 2001년 3월 30일 문을 열었다.
성철대종사는 비록 우리와 똑같은 속인의 모습으로 이 땅에 태어났지만 영원한 진리와 행복을 찾고자 하는 일념으로 부처의 길을 택하여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철저한 수행과 무소유의 삷으로 수행자는 물론 모든 이들에게 “우리시대의 부처”로서 추앙받고 있는 이 시대의 성인이다.
성철대종사의 부친인 율은 이상언옹의 호를 따 율은고택으로 명명한 생가는 크게 유물전시관과, 사랑채전시관으로 구분된다.
유물전시관에는 성철스님이 평소 지녔던 두루마기와 고무신을 비롯하여 평소의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는 소장 도서와 메모지, 유필 자료 등이 전시되어있다. 안채전시관과 사랑채전시관은 성철스님의 생가를 그대로 복원한 것이 아니고 당시의 일반적인 한옥의 형태로 이루어진 기념관이다.
겁외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이라는 의미로서 늘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고 자했던 성철대종사의 수행자적 의지가 담긴 이름이라 하겠다.
겁외사는 대웅전과 선방, 누각, 요사채 등이 부속 건물로 있으며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김소석 화백이 그린 성철대종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성철대종사 생가복원과 겁외사 창건의 의미는 성철스님 개인을 추앙하자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성철스님을 따라 깨달음을 향한 의지와 실천이 굳으면, 속인으로 오셨다가 부처님으로 가신 성철스님처럼 영원한 진리를 함께 할 수 있다는 표본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겁외사는 추모의 공간이 아니라 발심의 공간인 것이다. (옮겨온 글입니다)
백련암에서 도로를 따라 내려오면 해인사로 올라 가는 차도와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보행자 전용도로로 내려가면 성보박물관 및 상가가 나옵니다.
이곳은 제1 야영장 앞 주차장으로 성보박물관에서 집단시설지구를 지나 도로를 따라 1.2 Km 쯤 올라와야 됩니다. 이렇게 오늘 산행 및 백련암 둘러보기는 끝났습니다. 산행출발에서 여기까지 6시간 32분 걸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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