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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양산 봉암사산이 좋아예/경상도 산 2008. 5. 14. 05:50
희양산 일년 중 딱 하루 부처님 오신날만 개방한다는 문경에 있는 봉암사에 갔습니다. 괴산 연풍 IC에서 내려 은티마을까지는 10여분 걸리는데 여기서 산행을 시작하여 지름티재, 희양산, 성골(산성터), 홍문정을 거쳐 봉암사로 들어갔습니다. 순수 참배객이 아닌 산행꾼 차림의 사람들은 입사를 금한다고 하는데 오늘은 그리 복잡하지도 않았고 통제하는 모습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후일 산행하시는 분에게 들었는데 산행객의 입사통제로 2년 연속 봉암사 참배를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래사진 설명대로 하시면 산행꾼 차림으로 입사 가능합니다.
지름티재입니다. 여기서 바로 가면 봉암사로 연결되는데 출입통제를 하고 이었습니다.
계속 밧줄을 잡고 올라야 되는 구간입니다.
희양산 정상으로 돌멩이에 쓴 글씨가 정상임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저 아래 홍문정이 보입니다.
희양산에서 내려오다 보면 산성터가 있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길을 찾아 내려와야 합니다.
마을로 내려 섰습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꺽어 저수지 뚝길을 지나서 곧장 가면 봉암사로 연결되는 지름길입니다.
아기염소 여럿이 풀을 뜯고 놀아요 신나는 아기염소들......
밥공양을 하는 곳인데 아쉽게도 시간이 맞지않아....
보통의 절하고는 다른 흰색의 등만이 걸려 있었습니다.
배흘림 기둥으로 되어 있는 대웅보전입니다.
앞에 있는 돌탑을 두 번 쓰다듬고 소원을 빈 다음 둥근 돌을 들어올려 보는데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사람은 돌이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백운대 마애불입니다.
백운대는 절에서 10분 거리에 있습니다.
1년 중 딱 하루, 석가탄신일에만 문을 여는 절이 있다.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희양산에 자리잡은 봉암사다. 그동안 문경을 찾을 때마다 두어 번 봉암사에 들렀지만 일주문도 구경 못하고 발걸음을 물려야 했다.
속인은 물론 먹물 옷을 입은 중이라고 해서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니, 우리 땅에서 가장 문턱이 높은 절이다. 들리는 얘기론 그동안 봉암사에서 퇴짜를 맞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희양산 뒷자락이 백두대간길이라 산꾼도 많고, 희고 미끈한 화강암 절벽까지 갖추고 있으니 바위꾼들도 앞다퉈 봉암사를 기웃거렸지만 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 천년을 물려온 봉암의 탑과 부도, 법당을 보고 싶어하는 답사객들도 쉽게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문턱이 높은가? 한국 불교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한국 불교는 달마조사의 선맥을 이어왔는데 그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구산선문이 근간이 된다. 그 구산선문중 하나가 희양산문의 종찰인 봉암사다.
해방 직후인 1947년에는 성철을 비롯해 청담, 자운, 향곡, 월산, 혜암, 법전 등이 봉암사에서 한국 불교를 바로잡자고 다짐을 하고 수행에 들어갔다. 이것을 봉암결사라고 한다.(여름과 겨울 3개월 안거에 들어가는 것을 결제라 하고, 9개월 이상을 결사라고 한다.)
산문을 아예 걸어 잠근 것은 82년. 먹고 살만하니 관광객들이 몰려와 수행에 지장을 주자, 죽기 살기로 수행하던 수행자들이 지팡이와 곡괭이를 들고 희양산을 막았다. 전국에 딱 하나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는 도량을 만들자고 했다. 이때부터 봉암사가 조계종의 특별수련원이 됐다. 하안거, 동안거엔 100~130명 정도의 스님들이 결제에 들어가는데, 오겠다는 승려가 많아 경쟁도 치열하다. 워낙 규율이 엄해 웬만한 사찰의 주지들도 쫓겨나간다고 한다. 봉암사는 종정만 3명을 배출했다.
봉암(鳳巖)이라! 산그늘에 들어서면 일단 그 잘 생긴 바위벼랑이 눈을 잡는다. 879년 신라 때 창건자인 지증대사는 ‘산은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니 마치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치며 올라가는 듯하고, 계곡물은 백겹으로 띠처럼 되었으니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 듯하다. 하여, 스님의 거처가 되지 않으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하기야 봉암이란 이름 자체만 풀어보면 보통바위가 아니라 봉황바위란 뜻 아닌가? 인수봉 못지않게 미끈하고 잘 생겼으니 산꾼들이 입맛을 다실만하다.
신라 최치원도 ‘갑옷을 입은 무사가 말을 타고 나오는 형상’이라고 했다. 풍수를 모르는 사람들도 입이 딱 벌어진다. 늦은 아침, 봄햇살은 하얀 바위벽에 부서져 벼랑 아래 크고 작은 법당에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으니 명당은 명당이다.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극락전이다. 법주사의 팔상전, 화순 쌍봉사의 대웅전과 함께 목탑형식을 간직한 불전이다. 17세기에 불에 탔다가 다시 중건됐을 때 옛모습대로 복원하지 못하고, 형식만 갖추었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이층지붕을 한 극락전은 아무리 봐도 잘 생겼다. 흠 하나 없이 서있는 미끈한 보물 169호 삼층석탑. 주지 함현스님이 전날 왜 국보가 안됐는지 의아스럽다고 했던 그 탑이다. 수많은 전란 가운데서도 상처 하나 없다는 게 용하다. 몸돌에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지증대사적조탑도 아름답다. 보통 탑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지증대사의 사리를 모셨던 부도이기 때문이다. 다른 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관솔불을 놓아두는 노주석이 있는 것도 신기하다. 아쉬운 것은 중창불사를 해 옛모습은 많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계곡도 수려하다. 봉암사를 빠져나와 10분쯤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마애불이 서있는 백운대다. 축제가 열릴 때면 얼음물처럼 찬 계곡수가 쏟아지는 암반 옆에 자리를 펴고 차공양을 하는데, 올해는 00일에 선다공양이 있을 예정이다. 아쉽게도 백운대는 초파일에도 개방불가다.
(2008년 4월 초파일에는 백운대에 갈 수 있었습니다)
절을 돌아보는 동안 납옷을 입은 승려를 여럿 만났다. 외지인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인 채, 낯빛이 굳은 수행자들은 아마도 속가의 사람들이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동안거가 끝나고도 만행을 떠나지 않은 채 절에 남아 있는 것은 욕심을 부려 더 수행을 하고 싶었을 터. 방문객이 반가울 리 없다. 그나저나 봉암사는 선수행을 보다 강화해 올 6월부터는 3개월 안거가 아닌 9개월 결사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성철과 향곡 같은 큰스님들이 스스로를 토굴에 가두고, 눕지도 않았으며, 목숨 건 수행을 했다는 봉암사. 평소엔 엄하고 무거운 기운이 감도는 청정도량이지만 딱 하루 석가탄신일에는 전국 각지의 손님을 맞아 떠들썩한 잔치마당으로 변한다. 한국 제일의 선도량이 그날만은 문을 활짝 열고, 중생을 맞을 것이다.
(인터넷을 뒤지다가 2006년에 작성된 글을 옮겨 왔습니다.)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원하신다면
이리로 들어가 보세요... http://www.koreasan.com/san-search/san_view_form.php?num=468&p=1&mode=1&keytext=희양&flag_head=